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라 테슬라 (문단 편집) == 생애 == 1856년 크로아티아 리카 지방에서 [[세르비아인]] [[정교회]] [[신부(종교)|사제]]인 밀루틴 테슬라와 주카 테슬라(혼전성은 만디치) 부부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이나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의 영향인지 러시아 사람으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사실 니콜라(Никола/Nikola)라는 이름 자체가 러시아에서 사용되는 이름이 아닌, 이탈리아, 동유럽, 북유럽 등지에서 사용되는 인명이다. 러시아에서 해당 인명에 대응되는 이름은 '니콜라이'(Никола́й/Nikoláj).] 실제로는 러시아에서 공부도 일도 한 적이 없는 [[세르비아]]계 [[오스트리아 제국]][* 니콜라 테슬라가 살았던 지역은 후에 독립하여 [[크로아티아]]의 일부가 되었다.] 출신 미국인. 크로아티아에서 태어난 [[세르비아계 미국인]]이라 유고슬라비아 분열 이후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가 이 사람의 국적을 놓고 싸울 수도 있었으나 조용히 넘어갔다. 현재 세르비아는 수도 베오그라드 국제공항의 이름을 '베오그라드 니콜라 테슬라 국제공항'으로 바꾸고 지폐에도 그의 얼굴을 넣는 등 그를 기린다. 크로아티아도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을 만들어 세르비아와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심각한 상황까지는 가지 않았다. 테슬라는 생전에 자신의 혈통이 세르비아인이고 고향이 크로아티아인 것에 둘 다 자부심을 느꼈다고 한다. 매드 사이언티스트라는 이미지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언변의 소유자에, 연설도 꽤 잘 했다고 한다. 머리도 좋고 말도 잘 하고 8개국어를 하는 언어의 천재에다 얼굴도 잘 생기고 성격도 좋고 옷도 잘 입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엄친아]]. 당시 사교계의 스타였다. 다만 테슬라의 삶의 목적은 본인의 연구였기에, 사교계 진출도 연구를 위한 인맥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다. 음악과 시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86세까지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산 인물|평생 독신이었다]]. 미남에 능력자에 매너 좋고 옷도 잘 입는, 그야말로 여성들에게 인기가 없을 수가 없는 매력적인 남성이었지만[* 테슬라와 직접 만나본 여성들은 그에 대해서 "친절하고 예의바른 진짜 신사다."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테슬라의 일생에 친구 이상의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를 두고 동성애자니 무성애자니 논란이 많지만, 테슬라의 연구에 대한 엄청난 갈망과 집착을 보면 '''그냥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본인이 "나는 결혼한 남성이 만든 훌륭한 발명품들은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한 적도 있어 연애나 결혼생활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한편 테슬라의 누나와 여동생인 안젤리나와 밀카, 마리카는 결혼하여 자녀들을 두었다. 나중에 이 조카들은 테슬라가 미국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자 외삼촌의 유품들과 재산들을 정리하였다. 오스트리아 그라츠 종합기술학교에 입학하여 처음에 군 당국으로부터 장학금을 받았으나, 이후에 받지 못하여 졸업을 하지 못하였다. 그 후 체코의 찰스대학교에 입학하려고 하니 문제가 있었는데 필수과목인 그리어, 체코어를 공부한 적이 없었다. 결국 찰스대학교의 철학 강의에 청강으로 참석했지만 성적을 받지 못했다. 아무래도 필수언어를 못하는 문제가 큰 듯 하다. 학교를 그만두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온 후 에디슨 컴퍼니에서 일했으나, 직류에 올인을 외치는 [[토머스 에디슨]]과 대립, 회사를 뛰쳐나와 투자자를 긁어모아 자기 회사를 세운다. 그의 교류전기에 대한 실험이 성공을 거두고 사람들의 관심을 끌자 많은 투자자들이 몰렸고, 거금의 투자와 특허비 지급을 약속한 웨스팅하우스와 계약을 맺었다. 이후 직류 vs 교류 문제로 에디슨과 엄청나게 싸웠다는 것은 역사에서 이 대립을 전류 전쟁(War of Currents)으로 따로 기록할 정도로 유명한 일로 나중에(1915년) 에디슨과 노벨물리학상 공동 후보로 올랐을 때 서로 "저 놈이랑 같이 받느니 안 받고 만다"고 악담을 퍼부어 댔다는 루머가 있다. 특허 포기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 당시 에디슨 전기회사([[제너럴 일렉트릭]])와의 직류 vs 교류 전쟁에서 테슬라의 파트너였던 [[웨스팅하우스]]는 교류 전류 전송방식을 특허내서 같이 돈 많이 벌자고 제안했으나, 자신보다는 인류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며 특허등록을 거부했다는 설.[* "빛의 제국 - 에디슨, 테슬라, 웨스팅 하우스 그리고 전류전쟁"이라는 책에서 다르게 나온다. 교류 사업에 돈이 너무 많이 들어 자금사정이 시궁창이던 웨스팅하우스가 회사 사정상 로열티 지급을 할 수 없다고 말하자, 테슬라가 웨스팅하우스와의 신뢰로 특허권을 아예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빙성이 더 떨어진다. 로열티를 지급할 돈이 없으면 테슬라 스스로가 안 받으면 그만이다. 특허권을 포기하면 제3자의 진입장벽이 허물어져 웨스팅하우스 사의 시장을 뺏어가므로 오히려 웨스팅하우스 사더러 엿먹으라는 말밖에 안 된다.] * 미국 정부의 나이아가라 수력발전 건립의 발전형식으로써, 직류방식의 전력사업을 벌이고 있는 제너럴 일렉트릭(에디슨)과 교류방식의 전력사업을 시작하는 웨스팅 하우스(테슬라)가 경쟁이 붙었는데, 결국 교류 방식이 채택 되었고, 그에 따라 교류 방식이 전기공급의 대세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직류방식을 고집했던 제너럴 일렉트릭(에디슨)은 전기공급시장에서 밀려날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JP 모건의 지원으로 재정이 탄탄한 제너럴 일렉트릭은 부실한 재정상태인 웨스팅 하우스(테슬라)를 질 것이 뻔한 특허소송들로 압박하였고, 결국 자금의 압박을 버티지 못한 웨스팅 하우스는 교류전류에 대한 특허를 포기하였다는 설.[* history channal 다큐 "the men who built America"] 테슬라는 사건 이후 웨스팅하우스와 의견 대립 끝에 회사를 그냥 뛰쳐 나와 버렸다. 원래는 직류 전송 방식이 먼저 연구가 시작되어 발전소와 전력망을 만드는 등 먼저 쓰였으나, 결국 변압이 용이하며 장거리 송전에서 손실이 적은 점 등, 교류가 가진 여러 장점으로 인해 에디슨의 직류 전송방식은 일반 전기 분야에서 사장되고, 세계적으로 교류 전송 방식이 쓰이게 된다. 에디슨은 테슬라를 어떻게든 지게 만들기 위해 로비도 하고 언론에 선전도 하는 등 별 짓을 다 했다. 주변에 돌아다니는 고양이나 개를 전기로 태워 죽이는 실험을 많이 해서 주변의 고양이와 개들이 남아나지 않았을 정도. 교류가 매우 위험한 것으로 보이게 하려고 교류를 이용한 [[전기의자형|사형용 전기의자]]를 만들어서 사형수에게 시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 번 전기를 통한 후에도 연기가 모락모락 날 뿐 죽지 않았기 때문에 참관하던 간수에게 '''"차라리 화형을 하시죠"'''라는 말을 들을 정도. 결국 승리한 것은 교류. 톰소여의 모험의 작가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과 교류를 한 적이 있다. 소설 관련이 아닌 발명 쪽으로. 이 부분은 2015년 9월 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779136|다루었다.]] 그다지 수익성 있는 발명을 하지 못하여 상업화되지 못한 채 사라진 물건들이 많은 데다[* 그 예로, 최초로 [[라디오]](무선통신)를 발명했으나 에디슨과 싸우느라 그 공을 이탈리아의 발명가 [[굴리엘모 마르코니]]에게 넘겨야 했던 사례가 있다. 그걸로도 모자라서 마르코니가 성공하기 전에 무선통신 특허를 취득했는데 미국 특허청에 의하여 그의 무선통신 특허를 강제로 마르코니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에디슨과 맞먹을 정도로 성격이 나빴었다고 한다. 특히나 독선적인 고집불통에다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는데, 그런 면으로 인해 조수나 동료는 물론이고 [[J. P. 모건]] 등의 투자자들과도 언쟁을 자주 벌이고 안하무인으로 상대를 대해 한때는 조력자였던 대다수 지인과 친구들이 나중에는 대거 절교를 하거나 원수가 되었을 정도였다. 예를 들면 형광등의 경우 그 발명에 어느 정도 기여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제품화하여 상업적 성공을 거둔 사람은 다른 사람이었고, 심지어 전 세계에 형광등을 보급하여 떼돈을 번 회사는 바로 최대의 라이벌 에디슨이 만든 제너럴 일렉트릭이었다. 그 탓에 기껏 고생해서 고안해 낸 발명도 개발비가 없어 묻혀버린 경우가 많았다. 친구나 동료, 가족은 남아나질 않았다.[* 고국인 세르비아에 누나, 여동생과 누이의 자녀 등 형제와 조카들이 있긴 했다. 그 중 여동생 마리카의 아들 사바는 1942년 제2차 세계 대전을 피해 미국에 와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기 직전의 외삼촌을 만나기도 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전 세르비아 중앙 정계에서 고위 각료로도 활동했다. 큰누나 안젤리나의 차남인 미카는 의학을 전공하여 의사가 되었으며, 장남 니콜라는 외삼촌의 후광을 업고 과학자가 되기도 했다.] 게다가 노년기에는 호텔방과 임대주택 월세방을 전전하면서 매우 아끼는 존재던 비둘기에게 모이나 주는 가난한 삶을 살다가 1943년 뉴욕의 한 호텔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년의 사진은 4장 남아있다고 한다. 테슬라가 성격이 에디슨보다 더 나쁘고 독선적인 고집불통에 타협을 모르는 성격에, 다른 사람들을 안하무인으로 대했다는 여러 일화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맞는지 아닌지 논란이 있다. 원체 테슬라의 일생의 적지 않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기도 하고, 그나마 세간에 알려진 행적들도 일반인들 보기에는 하도 기묘한 구석이 있기는 하다. 한편 니콜라 테슬라는 자신이 어렸을 적에 죽었던 형 다니엘 테슬라를 자신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고 말하며 형에 비하면 자신의 능력은 별 것이 아니였다라고 인정하기도 했다. 그도 말년의 에디슨처럼 [[오컬트]]에 깊이 심취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